[삼국의 경제]
(1) 귀족과 농민의 경제 생활
- 귀족의 생활
삼국 시대 지배층은 귀족들이었다. 귀족은 본래 가지고 있던 사유지 외에 국가로부터 녹읍이나 식읍을 받아 토지와 농민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또 고리대를 이용하여 농민의 토지를 빼앗거나 농민을 노비로 만드는 방법으로 재산을 늘렸다.
- 농민의 생활
삼국 시대 평민의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농민들은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경작하거나, 귀족의 토지를 빌려 농사를 지으면서 국가와 귀족에게 조세로 곡물과 포를 납부했으며, 특산물과 노동력도 바쳐야 하였다. 이러한 부담으로 인해 농민 대부분은 생활이 어려웠다.
(2) 산업
- 농업
삼국은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철제 농기구를 널리 보급하고 우경을 장려하였으며, 수리시설을 확충하였다. 그러나 거름 주는 법(시비법)은 그리 발달하지 못하여 한 해 농사를 마치고 나면 대부분의 농토는 일정기간 묵혀 두어야 했다.
- 상공업
국가는 수공업 생산을 담당하는 관청을 두고 장인을 소속시켜 국가나 왕실에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였다. 수도에는 시장이 개설되었는데, 신라의 경우 지증왕 때 경주에 동사를 열었다.
- 대외 무역
외국과의 무역은 공무역의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4세기 이후 크게 발전하였다. 고구려는 중국의 남북조 및 북방 민족과 교역했으며, 백제는 중국의 남조 및 왜와 교역하였다. 신라는 초기에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중국과 교류했으나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로는 직접 교역하였다.
[통일 신라와 발해의 경제]
(1) 통일 신라의 경제
- 수취 제도의 정비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조세를 통일 이전보다 완화하여 생산량의 10분의 1 정도를 수취하였다. 공물은 촌락 단위로 그 지역의 특산물을 거두었는데, 향, 부곡에 사는 사람들이 일반 농민보다 더 많은 공물을 부담하였다. 군역과 요역은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 민정문서
조세, 공물, 부역 등을 합리적으로 수취하기 위해 신라는 민정문서(신라 장적, 신라 촌락문서)를 작성하였다. 8세기에 작성된 민정문서에 따르면, 각 촌락의 인구, 토지의 종류와 면적, 소와 말의 수, 수목의 종류와 수 등을 조사하여 3년마다 다시 기록하였다. 인구를 남녀를 연령에 따라 각각 6등급으로 구분하여 변동 사항을 자세히 기록하였으며, 호는 9등급으로 나누었다. 민정문서에 호구를 자세히 기록한 것은 국가가 노동력 수취를 중시하였음을 보여준다.
- 토지 제도의 변화
통일 후 신라의 진골 귀족들은 식읍과 녹읍을 통해 각종 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그러자 신문왕 때에는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하여 귀족의 특권을 제한하였고, 성덕왕 때에는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귀족이 백성을 사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막고 국가가 백성을 직접 지배하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귀족의 반발로 경덕왕 때 다시 녹읍이 부활되었다.
- 상업 발달
통일 후 신라는 국가 재정이 넉넉해지고 농업과 수공업 생산이 향상되면서 상업 활동도 활발해졌다. 그 결과 인구가 늘고 상품 수요도 증가하여 7세기 말에는 금성(경주)의 동시 외에 서시와 남시가 생겼으며, 이를 관장하는 관청도 마련되었다.
- 대외 무역
통일 후 신라는 당, 일본과의 무역이 활발해져 공무역뿐만 아니라 사무역도 발달하였다. 주요 국제 무역항으로는 울산과 당항성, 영암이 있었는데, 이곳을 통해 당의 산물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서역의 물품이 수입되었다. 해상 무역이 발달하면서 9세기 전반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남해와 황해의 해상 무역권을 장악하였다. 장보고는 산둥 반도의 적산촌에 법화원이라는 사찰을 건립하였다.
- 신라방과 신라촌
신라와 당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창장 강과 산둥 반도 지역에는 신라인의 거주지인 신라방과 신라촌이 생겨났으며, 이를 감독하는 관청인 신라소와 신라인의 사찰인 신라원 등이 세워졌다.
(2) 발해의 경제
- 농업과 목축
농업에서는 콩, 조, 보리, 기장 등을 재배하는 밭농사가 중심이었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벼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목축도 발달하여 돼지, 말, 소, 양 등을 길렀는데, 말은 주요 수출품이었다. 수렵도 활발해 모피, 녹용, 사향 등을 높은 가격에 수출하였다.
- 상업과 수공업
수공업은 철, 구리, 금, 은 등 금속 가공업과 도자기와 직물 제조업 등 다양한 분야가 발달하였다. 이로 인해 상경과 주요 교통 요충지역에서는 상업이 발달하였으며, 상품 매매에는 현물 화폐를 주로 썼으나, 외국의 화폐도 함께 사용하였다.
- 대외 무역
당과의 무역은 해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이루어졌는데, 당은 산둥 반도의 덩저우에 발해관을 설치하고 발해인이 이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신라와는 신라도를 통해, 일본과는 일본도를 통해 활발히 교류하였다. 발해의 수출품은 주로 모피, 인삼 등 토산물과 불상, 자기 등 수공업품이었고, 수출품은 귀족들의 수요품인 비단, 책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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