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삼국 시대의 사회

럽찐 2022. 1. 20. 19:56

(1) 신분제 사회의 성립

- 신분제 사회의 형성

부여, 초기 고구려, 삼한의 읍락에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호민과 농업에 종사하는 평만(하호), 최하층에는 노비가 있었다. 부여와 초기 고구려의 가, 대가로 불린 권력자들은 호민을 통해 읍락을 지배하였다. 이들은 중앙 집권 국가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차츰 귀족으로 편제되었다. 삼국 시대의 신분은 크게 왕족을 비롯한 귀족, 피지배층인 평민과 천민으로 구분되었다. 개인의 신분은 능력보다는 그가 속한 친족의 사회적 지위에 크게 좌우되었다.

- 귀족

고구려의 지배층은 왕족인 고씨를 비롯한 5부 출신의 귀족들로 구성되었으며, 백제는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지배층을 이루었다. 신라는 왕족인 김씨와 박씨, 석씨 등이 최고 지배층을 이루었는데, 이들이 중심이 되어 지방 족장 세력을 통합, 편제하는 과정에서 독특한 신분 제도인 골품제가 마련되었다. 왕족은 성골, 진골이 되었으며, 족장은 세력 크기에 따라 6~1두품으로 편성되었다. 신라의 골품제는 혈연에 따라 개인의 사회 활동과 정치 활동의 범위까지 엄격히 제한하였으며, 가족의 규모와 장식물은 물론 복색이나 수레 등신라인의 일상 생활까지 규제하는 기준으로서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 평민

평민층은 대부분 농민으로서 신분적으로는 자유민이었다. 하지만 나라에 조세와 특산물을 납부하고 노동력을 장발당하는 등 많은 제약을 받아 생활이 어려워져 노비로 전략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고구려에서는 진대법을 시행하여 가난한 농민을 구제하려 하였다.

(* 진대법 : 고국천왕 때 재상 을파소의 건의로 마련한 구휼 제도이다. 흉년이 들었을 때 국가가 농민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수확기에 갚게 하였다. 

- 천민

천민의 대다수는 노비였다. 이들은 왕실과 관청, 귀족에게 예속되어 잦은 노역에 종사하였다. 처음에는 전쟁 포로로 노비가 된 경우가 많았으나, 점차 죄를 짓거나 귀족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하여 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2) 삼국의 형벌 제도

- 고구려

고구려에서는 반역을 꾀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는 화형에 처한 뒤에 다시 목을 베었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적에게 항복한 자나 전쟁에서 패한 자도 사형에 처하였고, 도둑질한 자는 12배를 물게 하였다.

- 백제

백제는 반역한 자나 전쟁터에서 퇴각한 군사 및 살인자는 목을 베었고, 도둑질한 자는 귀양을 보내고 도둑질 한 것의 2배를 물게 하였다.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국가의 재물을 횡령했을 때는 3배를 배상하고 종신토록 금고형에 처하였다.

 

(3) 삼국의 풍속

- 고구려

척박한 환경에서 일찍부터 정복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던 고구려는 상무적인 사회 기풍을 지녔다. 평소 사냥을 즐기며 무예를 연마하였으며, 전쟁이 일어나면 귀족들이 앞장서서 적과 싸웠다. 혼인 풍속은 매우 간소하여 남녀가 자유롭게 교제하여 결혼하였으며, 예물도 간략하였다. 지배층의 혼인 풍습으로는 형사취수제와 함께 서옥제가 있었다.

- 백제

백제의 언어, 풍속, 의복은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일찍부터 중국 남조와 교류하여 지배층은 중국의 고전과 사서를 즐겨 읽고 한물에 능숙하였다.

- 신라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비해 발전이 늦어 씨족 사회의 전통을 오랫동안 유지하였다. 화백 회의는 왕의 폐위와 선출 등 국가 중대사를 귀족들의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는데, 이는 귀족들의 단결을 굳게 하고 국왕과 귀족 간의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하였다. 화랑도는 원시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기원하였는데, 진흥왕 때 국가 조직으로 정비되면서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신라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원광은 청소년들에게 세속 5계를 가르쳐 마음가짐과 행동 규범을 제시하였다.

(*화랑도 : 귀족 자제 중에서 선발된 화랑이 다양한 신불을 포함한 낭도를 이끄는 조직이었다. 그리하여 계층 간의 대립을 완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한편 이들은 원광이 제시한 세속 5계를 따랐다.)

 

[통일 신라와 발해의 사회]

(1) 통일 신라의 사회

- 골품제의 변화

골품제의 틀은 유지하였으나 통일 이후 골품 제도에 약간의 변화가 나타났다. 골품의 구분이 하급 신분층에서 점차 희미해지면서 3두품에서 1두품은 평민과 동등하게 간주되었고, 진골 가문이 6두품으로 신분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 신라 말기의 사회 변화

신라 말기에는 지방에서 호족 세력이 성장하고,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 확대, 자연 재해 및 국가의 강압적인 수취 확대로 생활이 어려워진 농민에 의한 봉기가 전국에서 일어나는 등 사회 변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진성여왕 때 발생한 원종·애노의 난(889)이 대표적인 신라 하대의 농민 봉기이다.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 세력을 구축한 호족과 유교 정치사상을 내세운 6두품 학자들이 연결되면서 골품제에 바탕을 둔 신라 사회는 해체되어 갔다.

 

(2) 발해의 사회

- 발해의 주민 구성

발해의 주민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일으로 구성되었다. 발해의 지배층은 왕족인 대씨와 고구려계 사람들이 많았지만 말갈계도 있었다.

- 발해의 사회 모습

발해의 풍습은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상층 사회를 중심으로 당의 문화가 널리 수용되었지만, 하층 촌락민에게는 고구려나 말갈 사회의 전통적인 생활 모습이 많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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