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삼국의 경쟁과 발전

럽찐 2022. 1. 12. 15:05

[고구려의 대외 팽창]

- 광개토 대왕 :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 지역을 차지하였으며, 5만의 군사를 신라에 파견하여 신라에 침입해 온 왜를 물리치고 한반도 남부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또한, 거란과 읍루(말갈)를 정벌하였으며, 선비족이 세운 후연을 격퇴하여 요동과 만주 지역을 확보하였다. 한편, 광개토 대왕은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 장수왕 :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중국의 남북조와 동시에 교류하고, 북방 유목 민족과도 폭넓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긴 뒤 남진 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한성을 점령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고구려의 남쪽 영역은 아산만에서 영일만을 연결하는 지역까지 확대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충주 고구려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백제의 중흥과 대외 교류 확대]

고구려가 남진 정책을 추진하자 신라와 백제는 나·제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하지만 결국 백제는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수도를 웅진(공주)로 옮겼으며, 이 때문에 한때 대외 팽창이 위축되었다.

5세기 후반 동성왕은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그 뒤를 이은 무령왕은 남조의 양과 문화 교류에 힘쓰는 등 국력을 회복하려 노력하였으며,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 성왕 :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겼으며, 부여 계승 의식을 내세워 국호를 남부여로 고쳤다. 또한, 중앙 관청을 22개로 확대 정비하고, 중국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고, 일본에 불교를 전하기도 하였다. 한편, 성왕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로부터 한강 하류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의 공격으로 이를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그 후 대가야와 왜를 끌어들여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관산성(옥천)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신라의 한강 진출과 영토 확장]

- 지증왕 : 지증왕 때에 이르러 왕이라는 중국식 칭호를 사용하고, 국호를 신라로 정하였다. 또한, 우경과 수리 사업을 장려하여 농업의 발달을 꾀하였으며,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 법흥왕 :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율령을 마련하고 불교를 공인하였다. 아울러 상대등과 병부를 설치하고,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대가야와 결혼 동맹을 맺고, 금관가야를 병합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 진흥왕 :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하여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불교 교단을 정비하였다. 백제의 성왕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막아낸 후, 다시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모두 차지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삼국 항쟁의 주도권을 쥐고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서 대가야를 정복하여 가야 연맹의 모든 지역을 편입하였으며, 동해안을 따라 함흥평야까지 진출하였다. 단양 적성비와 북한산비를 비롯한 4개의 순수비에 진흥왕의 정복 활동에 관한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고구려의 대외 항쟁과 신라의 삼국 통일

 

[고구려의 대외 항쟁]

-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변화 : 6세기 말 분열되었던 중국을 수가 통일하고, 그 뒤를 이어 당이 등장하면서 동아시아 정세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수와 당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자 고구려를 제압하려 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돌궐과 연결하고, 남으로 백제, 왜와 연결하는 연합 세력을 구축하여 대응하였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수·당과 연결하여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 수와의 항쟁 : 수가 고구려를 침략하려는 야욕을 보이자, 고구려는 전략적 요충지인 요서 지방을 먼저 공격하였다. 이에 문제는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물러났다. 이후 612년 수 양제가 10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을지문덕이 적을 유인한 뒤 살수에서 크게 격파하여 승리를 거두었다(살수대첩).

- 당과의 항쟁 : 수의 뒤를 이은 당이 태종 이후 고구려에 대한 침략 야욕을 드러내자, 고구려는 천리장성을 쌓아 대비하였다. 그 후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당에 대해 강경 정책을 추진하자 당 태종은 수십만의 대군을 앞세워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고구려는 안시성에서 3개월간 완강하게 저항하여 당의 침략을 격퇴하였다(안시성 싸움).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고구려가 수·당과 대립하고 있을 즈음, 신라는 백제에 대야성 등 여러 성을 빼앗겨 위기에 처하자 김춘추를 당에 파견하여 나·당 동맹을 체결하였다. 마침내,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였고,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를 격파한 뒤 사비성을 함락시키면서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백제 멸망 후 각지에서 저항 세력이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흑치상지는 임존성에서, 복신과 도침은 주류성에서 왜에 있던 왕자 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4년간 저항하였으나 나당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들을 돕기 위해 파견된 왜의 지원군이 백강 입구까지 왔으나 패하여 쫓겨 갔다(백강 전투). 이후 많은 백제 유민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고구려의 멸망과 부흥 운동]

고구려는 연이은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졌고, 연개소문이 사망한 뒤 세 아들 간의 권력 다툼이 일어나 정치적 혼란이 심하였다. 이 틈을 타 나·당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하자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고구려 멸망 이후 검모잠과 고연무가 왕족인 안승을 내세워 한성(황해도 재령)과 오골성을 근거지로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한때 평양성을 탈환하기도 하였지만, 내부 분열이 일어나면서 실패하였다. 그 후 신라는 안승을 금마저(익산)에 정착하게 하고 보덕왕으로 임명하였다.

 

[나·당 전쟁과 신라의 삼국 통일]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은 백제의 옛 땅 웅진 도독부를 두고, 고구려의 옛 땅에는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였다. 또, 경주에도 계림 도독부를 두고 신라 귀족의 분열을 획책하여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에 대항하였다. 결국 신라는 매소성과 기벌포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당을 몰아내고, 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삼국 통일은 삼국 문화를 융합함으로써 단일한 기반 위에서 민족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통일 과정에서 당의 세력을 이용하였고, 대동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상실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활동 반경을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으로 좁혀 놓았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