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철기 문화의 보급, 여러 나라의 성립

럽찐 2022. 1. 8. 20:20

[철기의 보급과 사회 변화]

만주와 한반도에서 철기 문화가 나타난 것은 기원전 5세기 무렵이었다. 칼, 창, 화살촉 등과 같은 무기를 비롯하여 도끼, 낫, 괭이 등의 농기구까지 철로 제작되었다. 한편, 철기가 보급되면서 세형동검, 잔무늬 거울 등의 청동기는 주로 의식용 도구로 사용되었다. 철기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업 생산력이 높아지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사회 계층 간의 분화가 더욱 뚜렷해져 갔다. 또한, 철제 무기를 사용한 부족이 세력을 크게 확대해 가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연맹 왕국이 형성되었다. 철기 시대 유적에서는 명도전, 반량전, 오수전 등의 중국 화폐가 발견되고 있어, 당시 중국과 활발히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경남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는 붓이 출토되어 당시에 이미 한자를 사용하였음을 보여준다. 무덤으로는 널무덤과 독무덤이 있었으며, 토기는 민무늬 토기, 덧띠 토기, 검은 간토기 등이 널리 사용되었다. 

 

[부여]

쑹화 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한 부여는 1세기 초에 왕호를 사용하였고 궁궐, 창고, 감옥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왕 아래에는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으며, 이들 가는 저마다 사출도를 다스리고 있어서 왕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다. 가들은 왕을 추대하기도 하였고, 수해나 한해를 입어 오곡이 잘 익지 않으면 그 책임을 왕에게 묻기도 하였다. 부여는 밭농사 위주로 농사를 지으면서 목축을 하였고, 말, 주옥, 모피 등의 특산물을 수출하였다. 부여에서는 왕이 죽으면 많은 사람들을 순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부여의 법률을 엄격하였는데,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으며, 남의 물건을 훔치면 12배로 배상하게 하였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풍습도 있었다(형사취수제). 매년 12월에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으며, 전쟁이 일어나면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다(우제점복)/

 

[고구려]

고구려는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추모)이 압록강의 지류인 훈장 강 유역의 졸본(환런) 지방에서 건국하였다. 이 지역은 산악지대였기 때문에 농토가 부족하였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주변의 소국을 정복하고 평야 지대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형사취수혼과 서옥제라는 혼인 풍습이 있었다. 그리고 건국 시조인 주몽과 그 어머니 유화 부인을 조상신으로 섬겨 제사를 지냈고, 10월에는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어 5부의 결속력을 다졌으며, 왕과 신하들이 국동대혈에 모여 제사를 지냈다. 

 

[옥저와 동예]

옥저는 함경도의 동해안에, 동예는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 일대에서 형성되었다. 이들 국가는 높은 산이 남북으로 펼쳐져 외부의 영향이 적었으며, 상대적으로 국가 발전 단계도 늦었다. 읍락마다 읍군, 삼로라 불리는 군장이 있었으나 이를 통합한 왕권은 형성되지 않았다. 옥저는 해안을 끼고 있어 어물과 소금 등 해산물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하였으며, 특산물을 고구려에 공물로 바쳤다. 동예 역시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여 농경, 어로 등 경제생활이 윤택하였으며, 특히, 명주와 삼베를 짜는 등 방직 기술이 발달하였다. 특산물로는 단궁(활), 과하마, 반어피(바다표범 가죽) 등이 유명하였다. 옥저의 혼인 풍습으로는 민며느리제가 있었으며, 사람이 죽으면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나중에 뼈만 추려 커다란 목곽에 안치하였는데 한 집안 식구를 한 곽에 묻는 독특한 풍습이 있었다(골장제). 동예에서는 매년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가 열렸다. 또한, 씨족 사회의 풍습이 늦게까지 남아 있어 족외혼을 엄격하게 지켰으며, 읍락마다 생활권이 구분되어 있었다. 만약 다른 읍락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였을 때에는 노비나 소, 말 등으로 변상하도록 하는 책화라는 제도가 있었다.

 

[삼한]

고조선 남쪽에서 일찍부터 진이 성장하고 있었는데, 고조선 멸망 이후 사회 발전이 촉진되어 마한, 변한, 진한의 연맹체들이 등장하였다. 삼한 중에서는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컸으며, 마한을 이루고 있는 소국의 하나인 목지국의 지배자가 마한왕 또는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 전체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삼한 정치적 지배자는 신지, 읍차 등으로 불렸다. 한편, 삼한에는 정치적 지배자 외에 제사장은 천군과 신성 지역으로 소도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천군은 농경과 종교에 대한 의례를 주관하였다. 후에 마한 지역은 백제에 통합되었으며, 변한 지역에서는 가야가, 진한 지역에서는 사로국이 성장하였다.

삼한 사회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농경 사회였다. 특히 벼농사가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한편,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마한, 낙랑, 왜 등에 수출하였으며, 철은 교역에서 화폐처럼 사용되기도 하였다. 해마다 씨를 뿌리고 난 뒤인 5월 수릿날과 추수를 끝낸 뒤인 10월에는 계절제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국의 경쟁과 발전  (0) 2022.01.12
삼국과 가야의 성장  (0) 2022.01.10
청동기 시대 / 고조선 / 위만 조선  (0) 2022.01.05
구석기/신석기 시대 비교  (0) 2022.01.04
티스토리 블로그 시작  (2) 2022.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