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 시대]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는 기원전 2000년경에서 1500년 무렵 청동기 문화가 시작되었는데, 이 시기의 유적은 중국의 랴오닝 성, 지린 성을 포함하는 만주 지역과 한반도에 걸쳐 넓게 분포하고 있다. 청동기는 주로 무기나 의식용 도구로 사용되었는데, 대표적인 유물로는 비파형 동검과 청동 거울 등이 있다. 간석기와 토기도 더욱 다양해져 반달 돌칼, 민무늬 토기, 미송리식 토기 등이 만들어졌다. 청동기 시대에는 조, 보리 등이 재배되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벼농사도 시작되었다. 농기구로는 반달 돌칼, 바퀴날 도끼, 홈자귀 등 정교한 석기가 사용되었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야산이나 나지막한 언덕에 움집을 짓고 거주하였다. 집터 모양은 직사각형이나 원형이며, 점차 지상가옥으로 바뀌어 갔다. 화덕은 움집 중앙에서 한쪽 벽으로 옮겨지고, 저장 구덩은 밖으로 돌출시키거나 따로 설치하였다. 집터의 크기가 다양한 것으로 보아 주거용 외에 창고, 공동 작업장, 집회소, 공공 의식 장소 등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 시대에 들어 농경이 발달하면서 잉여 생산물이 발생하자, 토지와 생산물에 대한 사유 개념이 생겨나 빈부의 차이가 생기고 계급이 분화되었다. 또한, 강력한 부족이 주변의 약한 부족을 정복하거나 통합하면서 군장이라 불리는 지배자가 등장하였다. 거대한 고인돌은 당시 지배층이 누렸던 권력과 부의 크기를 반영한다.

[고조선]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 단군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로 단군은 제사장, 왕검은 정치적 지배자를 뜻하는데, 이는 당시 사회가 제정일치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단군 신화에는 환웅 부족과 콤 토템 부족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 건국 과정과 지배 계급의 출현, 농경 사회의 모습 등이 반영되어 있다. 이는 고조선이 청동기 문화와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성립되었음을 보여준다. 고조선은 랴오닝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주변 지역을 통합하면서 한반도 북부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는데, 이는 비파형 동검이나 탁자식(북방식) 고인돌의 분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고조선은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철기 문화를 수용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기원전 3세기에는 부왕, 준왕과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고, 상, 대부, 장군 등의 관직을 두었다. 고조선은 중국의 전국 7웅 중 하나인 연과 대적할 만큼 강성하였다.

[위만 조선]
전국 시대 이후 진,한 교체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혼란이 계속되자, 이를 피해 고조선으로 넘어오는 유이민이 늘어났다. 기원전 2세기 초 위만이 무리 1,000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에 들어오자, 준왕은 서족 변경에 거주하게 하고 그들에게 변경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위만은 이주민 세력을 통솔하면서 점차 세력을 확대하였고, 마침내 수도인 왕검성을 공격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위만 조선은 철기 문화를 수용하여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춘 강력한 국가로 성장해 갔다. 우세한 무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 사업을 전개하여 영토를 넓혔고,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중국의 한과 남방의 진이 직접 교역하는 것을 막으면서 중계 무역으로 이익을 얻었다. 위만 조선의 경제, 군사적 발전에 불안을 느낀 한 무제는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여 고조선을 침공하였다. 고조선은 약 1년에 걸쳐 한의 군대에 맞서 완강하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지배층의 내분으로 왕검성의 함락되어 위만 조선은 3대 86년 만에 멸망하였고, 이후 한은 고조선의 옛 땅에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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