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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국가의 대외 교류와 문화

[고대 국가의 문화 교류] (1) 고대의 문화 교류 - 삼국의 문화 교류 고구려는 중국의 남북조와 북방 민족 등 주변국과 교류 또는 경쟁하며 성장하였다. 백제는 주로 바닷길을 통해 남중국과 교류하며 선진 문물을 수용하였고, 중국과 가야, 왜를 연결하는 서남해 교역을 주도하였다. 신라는 초기에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중국 문물을 수용했으나,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로는 중국과 직접 교류하였다. - 삼국의 서역과 교류 우즈베키스탄의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는 고구려 사신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모습이 그러져 있고,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서역 계통의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또한 경주의 계림로에서 출토된 금제 장식과 보검과 미추왕릉에서 출토된 유리그릇은 고대 신라가 서역과 교류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2) 통일 신라..

한국사 2022.01.24

삼국 시대의 사회

(1) 신분제 사회의 성립 - 신분제 사회의 형성 부여, 초기 고구려, 삼한의 읍락에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호민과 농업에 종사하는 평만(하호), 최하층에는 노비가 있었다. 부여와 초기 고구려의 가, 대가로 불린 권력자들은 호민을 통해 읍락을 지배하였다. 이들은 중앙 집권 국가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차츰 귀족으로 편제되었다. 삼국 시대의 신분은 크게 왕족을 비롯한 귀족, 피지배층인 평민과 천민으로 구분되었다. 개인의 신분은 능력보다는 그가 속한 친족의 사회적 지위에 크게 좌우되었다. - 귀족 고구려의 지배층은 왕족인 고씨를 비롯한 5부 출신의 귀족들로 구성되었으며, 백제는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지배층을 이루었다. 신라는 왕족인 김씨와 박씨, 석씨 등이 최고 지배층을 이루었는데, 이들이 중심이 되어 지방 ..

한국사 2022.01.20

고대 국가의 경제와 사회

[삼국의 경제] (1) 귀족과 농민의 경제 생활 - 귀족의 생활 삼국 시대 지배층은 귀족들이었다. 귀족은 본래 가지고 있던 사유지 외에 국가로부터 녹읍이나 식읍을 받아 토지와 농민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또 고리대를 이용하여 농민의 토지를 빼앗거나 농민을 노비로 만드는 방법으로 재산을 늘렸다. - 농민의 생활 삼국 시대 평민의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농민들은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경작하거나, 귀족의 토지를 빌려 농사를 지으면서 국가와 귀족에게 조세로 곡물과 포를 납부했으며, 특산물과 노동력도 바쳐야 하였다. 이러한 부담으로 인해 농민 대부분은 생활이 어려웠다. (2) 산업 - 농업 삼국은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철제 농기구를 널리 보급하고 우경을 장려하였으며, 수리시설을 확충하였다. 그러나 거름 ..

한국사 2022.01.17

통일 신라와 발해의 발전

[통일 신라의 발전] (1) 왕권의 전제화 - 무열왕계의 왕위 계승 신라에서는 삼국 통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왕권이 크게 강화되었는데, 이는 태종 무열왕이 진골 출신으로 최초로 왕이 된 이래로 무열왕계 직계 후손이 왕위를 계승하는 기틀이 되었다. 무열왕에 이어 즉위한 문무왕은 나·당 전쟁에서 승리하여 삼국 통일을 완성하였다. - 신문왕의 전제 왕권 확립 신문왕은 김흠돌의 반란 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왕을 중심으로 정치 세력을 다시 편성하였다. 중앙 정치 기구와 군사 조직(9서당 10정)을 정비하고, 9주 5소경 체제의 지방 행정 조직을 완비하였다. 또, 문무 관리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귀족의 경제 기반이었던 녹읍을 폐지하였다. 나아가 국학을 설립하여 유학 교육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 성덕..

한국사 2022.01.16

삼국의 경쟁과 발전

[고구려의 대외 팽창] - 광개토 대왕 :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 지역을 차지하였으며, 5만의 군사를 신라에 파견하여 신라에 침입해 온 왜를 물리치고 한반도 남부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또한, 거란과 읍루(말갈)를 정벌하였으며, 선비족이 세운 후연을 격퇴하여 요동과 만주 지역을 확보하였다. 한편, 광개토 대왕은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 장수왕 :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중국의 남북조와 동시에 교류하고, 북방 유목 민족과도 폭넓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긴 뒤 남진 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한성을 점령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고구려의 남쪽 영역은 아산만에서 영일만을 연결하는 지역까지 확대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충주..

한국사 2022.01.12

삼국과 가야의 성장

[고대 국가의 성립] 삼국은 초기부터 주변 소국을 활발히 정복하면서 영토를 넓혔고, 이를 주도한 국왕의 권력도 점차 강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연맹 왕국 단계에서 벗어나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다. 고대 국가에서는 왕위 세습권이 확립되고, 족장 세력은 왕권에 복속되어 중앙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 관제가 정비되고 관리의 복색과 관등이 제정되었으며, 확대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지방 제도도 정비되었다. 또한 율령을 반포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고, 불교를 받아들여 국왕 중심의 지배 이념을 확립하고 집단의 통합을 강화하였다. [고구려의 건국과 성장] - 고국천왕 : 고국천왕 때에는 부족적인 전통을 지녀 온 5부가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되었고, 왕위 계승도 형제 상속에서 부자..

한국사 2022.01.10

철기 문화의 보급, 여러 나라의 성립

[철기의 보급과 사회 변화] 만주와 한반도에서 철기 문화가 나타난 것은 기원전 5세기 무렵이었다. 칼, 창, 화살촉 등과 같은 무기를 비롯하여 도끼, 낫, 괭이 등의 농기구까지 철로 제작되었다. 한편, 철기가 보급되면서 세형동검, 잔무늬 거울 등의 청동기는 주로 의식용 도구로 사용되었다. 철기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업 생산력이 높아지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사회 계층 간의 분화가 더욱 뚜렷해져 갔다. 또한, 철제 무기를 사용한 부족이 세력을 크게 확대해 가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연맹 왕국이 형성되었다. 철기 시대 유적에서는 명도전, 반량전, 오수전 등의 중국 화폐가 발견되고 있어, 당시 중국과 활발히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경남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는 붓이 출토되어 당시에 이미 한자를 사용하였음을 ..

한국사 2022.01.08

청동기 시대 / 고조선 / 위만 조선

[청동기 시대]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는 기원전 2000년경에서 1500년 무렵 청동기 문화가 시작되었는데, 이 시기의 유적은 중국의 랴오닝 성, 지린 성을 포함하는 만주 지역과 한반도에 걸쳐 넓게 분포하고 있다. 청동기는 주로 무기나 의식용 도구로 사용되었는데, 대표적인 유물로는 비파형 동검과 청동 거울 등이 있다. 간석기와 토기도 더욱 다양해져 반달 돌칼, 민무늬 토기, 미송리식 토기 등이 만들어졌다. 청동기 시대에는 조, 보리 등이 재배되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벼농사도 시작되었다. 농기구로는 반달 돌칼, 바퀴날 도끼, 홈자귀 등 정교한 석기가 사용되었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야산이나 나지막한 언덕에 움집을 짓고 거주하였다. 집터 모양은 직사각형이나 원형이며, 점차 지상가옥으로 바뀌어 갔다. 화덕..

한국사 2022.01.05

구석기/신석기 시대 비교

우리나라에서 구석기 시대가 시작된 것은 약 70만 년 전부터였다. 구석기인들은 동물의 뼈나 뿔로 만든 뼈 도구와 주먹도끼와 찍개 같은 뗀석기를 사용하였다.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평남 상원 검은모루 동굴, 평남 덕천 승리산 동굴, 충북 단양 금굴, 충북 청원 두루봉 동굴, 경기도 연천 전곡리 유적, 충남 공주 석장리 유적 등이 있다. 구석기인들은 주로 동굴이나 막집, 바위 그늘 등에 무리를 지어 살며 채집과 사냥을 하면서 살았으며, 더 나은 생활환경을 찾아 오랜 세월에 걸쳐 이동 생활을 하였다. 구석기시대 말부터 기온이 따뜻해지고 자연환경이 변하자 사람들은 먹잇감을 따라 이동하거나 환경에 적응하면서 도구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슴베찌르개와 같은 이음 도구와 잔석기, 활 등이 등장하였다. 구..

한국사 2022.01.04